1단원 번영, 불평등, 그리고 전 지구적 한계들

1.11 사례 분석: 인도의 생활수준이 낮아진 이유는 인도가 영국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인가?

기술혁신과 무역은 영국과 인도의 섬유산업의 운명을 뒤바꿨다.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는 1600년에 시작되었다.그 이후 200년 동안 영국은 인도에서 지배적인 식민 강국이었고, 19세기 중반에는 인도를 완전히 통치하게 되었다.

영국 산업혁명의 서막은 인도에서 전통적인 기술을 사용하여 만든 진기한 옷들의 판매가 급증한 시기였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의 저자 다니엘 디포(Daniel Defoe)는 1727년 “갑자기 모든 여성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인도산] 캘리코 옷을 입기 시작했다” 라고 썼다. 그는 계속해서 “중국, 인도 및 여러 동양 국가들은… 사실 가장 광범위한 제조업과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제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제품은 값싼 가격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한 세기 반 후, 무역의 흐름은 반전되었다. 인도에서 팔리던 섬유의 절반 이상이 영국의 증기 동력 방직공장에서 생산된 것이었고, 한 때 세계를 재패했던 인도의 섬유산업은 영구적인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품 생산국 중 하나였지만, 영국의 식민통치 아래에서는 농업기반 경제로 남아 있었다. 섬유산업이 쇠퇴한 후, 주요 수출품은 농산물이었으며,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인도는 소프트웨어와 컴퓨터 서비스의 주요 수출국이 되었다.

빈곤 분석 전문가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은 1947년 300년간의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가 끝났을 때를 가리키면서 “인도인들의 유년기 시절 결핍이 역사상 발생했던 어떤 대규모 집단의 결핍만큼 심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영국의 식민통치가 끝나가던 시기, 인도에서 태어난 아이는 27년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독립 후 50년이 지난 시점에는, 인도에서 출생 시 기대수명은 63세로 늘어났다.

이 그래프에서 가로축은 1600년부터 1975년까지의 연도를 나타내고, 세로축은 1990년 미국달러가치로 환산된 1인당 GDP를 나타내는데 0에서 1500까지의 범위를 가진다. 중국과 인도의 데이터가 표시되는데, 인도의 경우, 1600년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을 때 1인당 GDP가 약 650이었고, 이후 3세기 동안 영국의 실질적인 통치기간동안 550에서 650 사이에서 변동하다가, 1950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거의 900까지 증가했다. 중국의 경우, 1600년에 1인당 GDP가 800에서 1700년에 1000으로 증가했다가, 영국, 프랑스, 일본의 중국 내 개입이 증가한 기간을 거치면서 1950년에는 650으로 감소했고, 1954년 중국 공산당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1975년에 1100으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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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7 외세 간섭시기의 인도와 중국 경제의 침제와 쇠락.
주: 영국의 개입 이전 인도의 평균소득은 감소하고 있었다. 그림 1.1에서 본 것처럼, 1975년 이후 두 나라의 평균소득은 매우 빠르게 증가했다. 그림 1.1은 또한 1975년 영국의 평균소득이 1600년의 평균소득의 11배였음을 보여준다. 외세의 개입에 저항했던 일본의 평균소득은 그림 1.17에서 보여준 기간 동안 17배 증가했다. 1975년 이후 인도와 중국의 경제성장이 가속화되었다.

Stephen Broadberry. 2021. ‘Accounting for the great divergence: recent findings from historical national accounting’.; Total Economy Database.; S. Broadberry, H. Guan, and D. Li. 2018. ‘China, Europe and the Great Divergence: A Study in Historical National Accounting’ Journal of Economic History 78: pp. 955–1000.; S. Broadberry, J. Custodis, and B. Gupta, B. 2015. ‘India and the Great Divergence: An Anglo-Indian Comparison of GDP per Capita, 1600–1871’ Explorations in Economic History 55: pp. 58–75.

그림 1.17은 그림 1.1의 일부를 확대한 것인데, 이 그림은 식민지 시대의 인도에서 1인당 생산량이 감소했음을 보여준다. 인도 경제의 도약은 1947년 독립 직후 시작되었다. 경제쇠퇴 후 경제성장이 이어지는 패턴은 중국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중국은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지만 외세의 지배력이 강화되던 지난 세기 중반까지 비슷한 패턴을 경험한 바 있다.

인도 사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인도의 생활수준이 낮아진 이유는 인도가 영국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인가?”

이 질문에 충실히 답하려면,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알아야 한다. 1.10절에서도 서독을 “대조군” 또는 “반사실적”으로 사용하여 동독이 계획경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묻는 유사한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인도의 역사에서 영국의 통치없었더라면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적절한 반사실적 대조군을 찾을 수 있을까?

일본이 적절한 비교 대상일 수 있다. 1600년에 일본은 인도만큼 가난했지만(그림 1.1을 참고하라), 외세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인 기술혁신을 이루고 있던 영국 및 다른 선진국 경제에서 개발된 새로운 기술을 빌려와 사용하는 데 능숙했던 일본은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인도가 독립 상태로 남아 있었다면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지는 알 수는 없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영국 식민 통치자들이 취한 두 가지 조치가 인도의 생활수준을 낮춘 것으로 보인다.

경제개발을 위한 것이 아닌 군사적 용도로 사용된 철도: 인도의 철도는 주로 군사목적으로 설계되었으며, 특히 1857년 영국 식민지군대에 소속된 인도 군인들의 반란 이후로 그렇게 되었다. 반면에 미국, 캐나다 및 다른 경제에서는 철도와 항구 같은 공공 인프라의 개발을 통해 농산물시장을 확장하고 이를 처리하는 산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농업 지역의 번영이 이루어졌다.

인도 농업을 지원한 교통 인프라는 농산물을 현지 제조업체로 운송하여 가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농산물 수출을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가죽은 현지에서 신발로 제조되지 않고 수출되었다. 그 결과 농업기반경제 및 농산물을 사용하는 산업의 성장 기회가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지역 엘리트들의 권력 강화: 인도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 영국 식민지 통치자들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지역 엘리트들, 특히 대토지 소유주에 의존했다(물론 그들도 세금의 일부를 가져갔다). 그 결과 강력한 지주들의 권력과 사유재산이 강화되었으며, 이들은 경제를 현대화하는 것보다 세금을 징수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영국통치 이전에도 이들로부터 토지를 임대받거나 임금노동자로 고용된 사람들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지만, 1793년의 영구정착협정(the Permanent Settlement)으로 인해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협정을 통해 동인도 회사(사실상의 식민 통치자였다)는 지주들에게 세금 징수 권한을 부여했고 그들을 사실상의 국가 공무원으로 만들어 정부의 통치 권한을 부여했다.

영국의 세금 및 토지소유 정책이 식민지 전역에서 동일하게 시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영국 제도가 이후 인도의 경제성장에 미치는 중요성을 테스트할 수 있는 자연실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경제학자 아브히지트 바네르지(Abhijit Banerjee)와 락슈미 아이어(Lakshei Iyer)는 식민지 토지소유 및 세금시스템에 의해 지주들이 권한을 부여받은 인도의 여러 지역과, 지주들이 배제되고 대신 마을공동체나 개별 농부에 대한 직접 과세가 이루어진 인도의 다른 지역 사이에서 독립 후 경제성과와 사회지표를 비교했다. 그들은 지주가 통제한 지역이 투자율이 낮고 비료 및 기타 현대적인 투입요소의 사용이 적어 농업생산성의 성장률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주가 통제한 지역은 교육 및 건강 개선면에서도 크게 뒤처져 있었다.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는 영국과 인도의 운명이 갈리는 시기와 일치했다. 인도가 초기 섬유 제조업에서의 선두 자리를 내어준 것, 그리고 농촌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침체된 농업경제로부터 벗어나는 데 실패하게 된 것 등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통치의 유산의 일부이다.

경제학자이자 역사가인 비슈누프리야 굽타(Bishnupriya Gupta)는 1947년 독립 이전 인도의 생활수준의 정체와 쇠퇴를 탐구했다.

확인문제 1.10 다음 중 옳은 것을 모두 골라라.

1600년에서 1750년 사이의 기간(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기간이다) 동안 인도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 감소하고 있었다. 농업 생산성이 감소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이었다.
  • 감소하고 있었다. 한때 번창했던 섬유산업이 영국 섬유제품에 의해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상승하고 있었다. 인도내 섬유산업이 번창하고 있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농업보다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1800년에서 1950년 사이를 고려할 때, 1800년에 200년 후보다 영국의 1인당 GDP 수준에 더 가까웠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생산성 감소가 총생산량에 미치는 영향이 섬유 분야의 산업 생산량 증가에 따른 영향보다 더 컸고, 그 결과 1인당 GDP가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 이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영국 섬유제품의 생산비용이 감소한 이후에 발생한 일이다.  
  • 이 기간 동안 인도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많았으며, 1인당 GDP가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 산업혁명 기간과 그 이후에 영국의 평균소득은 증가했지만 인도의 평균소득은 1947년 독립 이후까지 감소하면서 인도와 영국의 1인당 GDP 격차는 점점 더 커졌다.

중국은 유럽 국가의 식민지가 된 적은 없지만, 19세기 초부터 영국, 포르투갈 및 다른 나라들이 홍콩과 마카오와 같은 여러 주요 항구를 통제하고 중국 정부가 중요한 경제문제에서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간섭했다. 이러한 외세의 개입은 20세기 중반 혁명의 성공으로 중국이 공산당 통치 하에 놓이게 되면서 끝났다. 외세의 개입 기간 동안 중국의 1인당 소득은 감소했다.

경제적, 군사적 강국으로서의 영국과 이후 유럽 전체의 부상은 세계적으로 재화와 서비스가 어디에서 주로 생산되는지를 보여주는 전 세계 생산의 지리적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경제규모를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으로 측정하면, 타베르니에(Tavernier)가 17세기에 인도를 방문한 이래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 1600년에는 인도, 중국, 그리고 아시아 나머지 지역에서 전 세계 생산량의 5분의 3을 생산했으며, 이는 서유럽의 생산량의 세 배에 해당했다.
  • 1750년에는 중국이 전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3분의 1을 생산했으며, 인도의 섬유 및 기타 제조업 생산량은 유럽 전체보다 많았다.
  • 1850년이 되어서야 런던이 베이징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그림 1.18은 세 개의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생산량이 전 세계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며, 세계 생산량의 지리적 변화를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 1800년 이전에 세계 생산량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시아에 살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1인당 생산량은 지역별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 1800년 경부터 유럽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1인당 생산량도 증가하면서 세계 총생산에 있어서 아시아의 기여도는 감소하는 반면 서구의 기여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 최근 몇십 년 동안 동아시아와 남아시아(특히 인도와 중국, 그리고 베트남과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 아시아는 다시 서구보다 더 큰 비중으로 세계 생산에 기여하고 있다.
이 그래프에서 가로축은 1500년부터 2008년까지의 연도를 나타내고, 세로축은 각 지역 생산이 세계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며, 0%에서 80%까지의 범위를 가진다. 아시아의 생산이 세계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00년부터 1800년까지 65%에서 60%로 감소했다. 1950년에는 20%로 감소하다가, 2008년에는 45%로 증가했다. 서구의 생산이 세계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00년부터 1800년까지 20%에서 25%로 증가했다. 1950년에는 거의 60%로 증가하다가, 2008년에는 38%로 감소했다. 그외 지역의 세계 생산비중은 1500년부터 1820년까지 약 18%였으며, 1970년에는 25%로 증가하다가, 2008년에는 20%로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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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8 아시아, 서구, 그 외의 지역의 생산이 전 세계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 서구는 서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한다. 그외 지역은 라틴아메리카, 일본, 아프리카 및 동유럽 지역이다. 동유럽 지역은 20세기 후반에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던 러시아 및 다른 국가를 포함한다.

Angus Maddison. 2007. Contours of the world economy 1–2030 AD: Essays in macro-economic history. OUP Oxford.; IMF World Economic Outlook. 2022.

이 장기적인 변화를 시각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서구와 아시아의 생산량이 전 세계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시간 경로가 집게 모양을 닮았다는 점을 눈여겨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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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기적인 변화를 시각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서구와 아시아의 생산량이 전 세계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시간 경로가 집게 모양을 닮았다는 점을 눈여겨 보도록 하자.

확인문제 1.11 다음 중 옳은 것을 모두 골라라.

다은 진술을 읽고 옳은 것을 모두 골라라.

  • 1727년,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인 다니엘 디포는 중국, 인도, 그리고 다른 동양 국가들이 매우 제한된 제조업 활동을 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 경제학자 아브히지트 바네르지와 락슈미 아이어의 연구에 따르면, 인도에서 대지주들에게 권한을 부여한 식민지 시대의 세금시스템이 현재의 농업 생산성, 교육, 건강수준이 낮은 것과 연관이 있음을 발견했다.
  • 인도에서는 철도와 항구와 같은 공공 인프라가 농산물 시장을 확장하고 이를 가공하는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설계되었다.
  • 1500년대 초부터 오늘날까지 전 세계 GDP의 60% 이상이 서구(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 그는 이러한 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제조업과 가장 다양한 제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 이들의 연구는 영국의 과세 및 토지소유제도가 농촌지역에서 지역 엘리트들의 권력을 강화시켜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 이는 미국과 캐나다의 경우였으며, 인도에서는 철도가 주로 군사 목적과 원자재 수출을 위해 설계되었다.
  •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최소한 세계 GDP의 60%가 아시아에서 생산되었다.